왜 그들은 그곳으로 갔을까?(빗점골-명선봉능선-절터골)
- 구름모자 -
『내가 지리산을 찾는 또 하나의 이유를 오늘 알았습니다. 지리산은 아직도 우리가 찾아가고픈 골짜기와 능선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아직도 그 지혜(智)의 깊이를 모르겠습니다.』
빗점골에 대한 첫 느낌은 누가 뭐래도 파르티잔(partisan)과 이현상이다.
남부군을 쓴 이태씨는 남한 파르티잔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을 술회하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영웅’ ‘외로운 방랑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총수’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면 ‘고독’ ‘방랑자’라는 단어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그것은 금기시 되었던 이데올로기시대의 반세기가 그의 족적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차량이 들어갈 수 있는 의신까지는 포장도로이다. 지리산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서는 대성골을 오르는 대표적인 장소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곳에서 가장 깊은 골은 빗점골이다. 엄밀히 말해 빗점골은 의신에서 삼곡(三谷)이 모이는 합수내까지를 이르지만 그곳에서부터도 골짜기의 끝은 토끼봉, 명선봉, 형제봉에까지 이른다.
의신에서 삼정마을까지는 비포장도로이다. 60년대 군정에서 잘라낸 작전도로로 우리 가슴뿐 아니라 산에게까지도 아직 아픈 상처가 남아 있지만, 삼정마을과 의신마을 사람들에게는 염소방목장과 고로수 등을 채취하기 위하여 요긴하게 쓰이는 도로이다. 때문에 마을주민들이 어설프게나마 보수를 해놓아 삼정마을까지는 차량이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세가구가 살고 있는 삼정마을부터는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어 비로소 실질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길은 비록 인위적으로 열린 길이라 하나 산내음이 가득하니 예서부터도 지리의 깊음을 실감할 수 있다.
비가 온다던 하늘은 잔뜩 찌뿌린 채 있지만 다행이도 비는 뿌리지 않았다. 멈춰서 뒤를 보면 의신골엔 못다 내린 이슬이 자욱하고 실루엣으로 그려지는 먼 하늘금은 한 점의 섬처럼 고고하다.
삼정마을을 지나 빗점골과 맨 먼저 합수되는 골은 오리정골이다. 형제봉과 벽소령 사이에서 내리는 골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오리정골엔 이름 없이 사라져간 파르티잔들의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봄은 이제 시작인 것 같으면서도 산의 색깔은 이미 초여름 빛이다. 성급한 봄꽃들은 벌써 시들어져 가고, 웅덩이엔 세끼손톱만한 올챙이가 꼬리를 흔든다.
차량이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서 도로는 크게 우회한다. 그 길을 곧장 오르면 벽소령이나 선비샘으로 오를 수 있다. 빗점골은 그곳에서 합수내 골짜기로 산길을 가야한다. 파르티잔들의 활동지를 탐방하는 사람들로 인해 당분간은 산길이 뚜렷하고 중간중간 표지판이 세워져있다.
불과 백여미터 걸으면 너른바위가 나온다. 단어의 의미처럼 특별하게 너른 바위가 있는 게 아니고 계곡으로 길게 누워있는 너덜지대이다.
바로 이곳에서 이현상은 최후를 맞는다. 총수를 내놓은 채 평당원 신분으로...
이현상은 부친과 형제가 대를 이어 면장을 지냈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미 국운이 풍운에 맡기어진 시절 꿈을 찾던 젊은이는 중앙고보 재학 중인 1925년 박헌영등과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한다. 그리고 1927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법학도시절에는 반일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체포되는 등 일제하에서만 12년의 감옥생활을 한다. 왜놈들의 수탈로 배고픔에 쪄들고, 강재징용으로 생사마져 암울했던 시절, 양반상놈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살자는 사회주의는 죄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상주의자들의 꿈이 아니고 이루어 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투쟁해 나간 현실이었다. 따라서 그 시대의 공산당 활동은 다시 말하면 항일투쟁이었다.
해방후 박헌영, 김삼룡등과 함께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을 재건하여 활동하지만 1948년 남한에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러시아 유학을 위해 박헌영, 이승엽등과 함께 평양으로 갔다가 다시 남하해 지리산으로 들어가 5년간의 파르티잔 생활을 시작한다.
파르티잔은 정규군과는 달리 노동자나·농민·시민으로 조직된 순수 민간유격대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지역의 지형과 지세에 밝고, 적의 동정을 철저하게 파악하여 적이 강하면 철저하게 숨기고 적이 약하면 일거에 섬멸하는 비정규 전투전이 주특기이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에 이미 지리산 투쟁경험이 있었던 그에게는 이곳이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다.
일제 강점기의 항일 파르티잔운동은 민족적 자존심을 가진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런 그도 끝내는 이곳 합수내 너른바위에서 고독한 전설 속 영웅으로 사라진다. 주검조차도 이 세상 모든 것과 버림받은 채......
내가 서 있는 이 곳 너덜강 어느 바위엔 그의 혼이 묻어 있으리라. 피우지 못한 그의 꿈이 서려 있으리라. 그러나 이젠 비운의 방랑자도, 공화국의 영웅칭호도 다 부질없는 일이다. 누가 적군이고 누가 아군이라더냐, 어차피 피를 나눈 한민족이었던 것을...
너른바위를 지나면 합수내 삼거리다. 명선봉과 형제봉사이를 흐르는 절터골과 토끼봉과 명선봉 사이를 흐르는 산태골, 왼골의 세 지류가 이곳에서 만나 빗점골의 상류를 이룬다.
계곡을 건너야하는 절터골은 예전에 절이 있었다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그 곳을 올라서면 이현상 아지트가 큰 너덜강 속에 숨어있다. 날씨마져 흐린 오늘 같은 날은 금방이라도 숨긴 몸을 일으켜 반갑다고 손을 내밀 것 같다.
명선봉 능선과 절터골은 이곳 바로 위에서 나뉜다.
당초 절터골을 오르려던 계획은 뒤따르던 일행이 명선봉 능선으로 오르는 바람에 부득불 절터골에서 식수를 준비하여 바쁜 걸음으로 된비알을 올라챈다.
날씨가 흐리고 습도가 많은 탓에 비칠비칠 땀이 쏟아진다. 그렇게 이내 속을 오르다보면 비트에서 갑자기 나타난 파르티잔처럼 커다란 바위가 벌떡 일어선다. 때마침 능선을 넘어오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니 그 예전 피아의 전쟁소리가 꿈결인 듯 들려온다.
다시 일행을 만난 것은 능선마루에 첨병처럼 서있는 바위 모퉁이에서였다. 헤어졌던 불안감과 다시 만난 안도감은 발아래 흐르는 안개처럼 색깔도 없이 섞여 버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만이 이름 없이 숨져간 파르티잔들의 슬픈 넋을 달랜다.
어림잡아 해발 일천백, 이후부터 명선봉까지는 지리산 어느 지능(支稜)과 마찬가지로 바윗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니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약간의 고빗사위는 있으나 멀쩡한 사지만 있으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능선이다. 그렇게 바위모서리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거꾸로 내려오며 우리를 조롱한다. 겨우 그걸 가지고 끙끙거리고 있냐고...
답답한 태양이 구름을 뚫느라 애를 쓰고 있는 기운이 역력하다. 바위벼랑에 올라서 전망이라도 볼라치면 먼 경치를 보여주진 않아도 우리 몸엔 따스한 햇살의 기운이 감돈다.
몇 번의 바위귀퉁이와 나무 밑둥을 잡고 씨름을 하다보면 평퍼짐한 안부에 닿는다. 숲은 갑자기 고산 숲으로 바뀌고 길은 좌측으로 하나를 더 갈라놓았다. 산태골 방향이지만 산태골을 직접 내리는 길은 아니고 어느 스님께서 수도하고 있는 기도처가 있는 곳이다.
참취와 곤달비, 단풍취가 지천이고 키작은 나무들의 이파리가 앙증스럽다. 이곳에선 명선봉이 지척이다.
명선(明仙)이라함은 ‘신선’과 ‘밝음’이니 곧 깨침을 뜻한다. 이 곳에 올라보면 그런 곳임을 곧 알 수 있다. 봉우리는 연꽃처럼 두리뭉실하여 선인仙人이 가부좌를 틀고 수도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정상엔 얼레지, 양지꽃, 참꽃마리, 동의나물, 별꽃, 박새 등이 함초롬히 피어 있고, 아직 꽃이 오르지 않은 동자꽃, 비비추, 앵초, 개미취, 미역취, 마타리, 엉겅퀴들이 새순을 틔우고 있어 여름엔 어느 곳보다도 화려한 천상의 화원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산화경방기간이 끝난 첫날이어서 인지 주능선 나무계단을 내려오는데도 좀처럼 사람보기가 어렵다. 연하천엔 그나마 몇 명의 산꾼이 산장주변을 서성이고 있어 사람냄새가 난다.
점심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밥까지 새로 지은 후 곰취와 개발딱쥐(단풍취)로 포식을 한다.
절터골 초입은 형제봉 방향으로 이·삼분 나아가다 철책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길은 비교적 뚜렷하고 가끔씩 매니아들의 시그널이 매달려 있다.
처음 길은 너덜강이다. 날씨가 습하여 태가 낀 바위는 기름을 바른 듯 미끄럽다. 따라서 넘어져 코방아라도 찧지 않으려면 가끔은 나무줄기와 넝쿨을 붙들고 사정을 해야 한다. 이제 시작이다 싶은데도 곧 물을 만난다. 연하천이라는 내川의 의미를 금새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계곡은 거의 원시적이다. 이 땅에서 파르티잔이 사라진 뒤로 이곳을 오르기 시작한 건 불과 십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매니아들만이 관리공단 직원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떠도는 원혼과 예기할 뿐, 일반인들은 들기조차도 쉽지 않은 곳이다.
제법 너른 물줄기를 이루고 있는 데도 너덜은 끝을 맺을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비트로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이현상에 관한 숫한 전설 중엔 황당무게한 것까지도 남아 있다. 축지법을 쓴다든지, 몇 길 담장을 훌쩍 넘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워낙 행동이 민첩한 데다 오랜 산중생활로 위험을 간파하는 촉각이 온몸에 배어 있어 만들어진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일제가 바라본 그를 보면 그의 사회주의 관념이 얼마나 철두철미했는지를 알 수 있다. 왜놈 순사에게 검거되어 조사 받았던 당시 경찰 신문조서를 보면, 이현상은 ‘피의자 소행조서’에서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 하다고 기재돼 있고 “극력한 사회주의자로서 개전의 가능성은 없음”이라고 적혀있다. 그랬던 그가 러시아 유학차 월북하였다가 김일성 반대파로 의심받자 남한으로 내려왔으니 지리산 밖에는 반겨줄 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태의 남부군을 보면 육이오동란시 인민군이 패퇴하자 북으로 이동하였으나 그해 11월 강원도에서 다시 남하하라는 명령을 받고 소백산, 덕유산, 민주지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현상은 남과 북에서 모두 버려진 방랑자였다. 전선 아득한 후방의 적진 한가운데서 자군의 지원도 없이 벌여야 했던 파르티잔생활은 그의 사회주의 신념에 얼마나 지독한 고독의 이슬이 진하게 묻어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말년에 평당원으로 강등되어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이 계곡을 다니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정말 사회주의는 평등과 기회균등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 이상의 세계라 꿈꾸었을까? 아님 월북했던 남로당의 잔여세력처럼 ‘미국간첩’운운하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지들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하지만 분명한건 평생을 사회주의사상으로 살아왔던 그의 소망은 그가 대표했던 남한 파르티잔들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길은 계곡을 한번도 건너거나 벗어나지 않고 우측으로 나있다. 다만 그 길이 너무 적막하여 조그만 산짐승 한 마리의 발자국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내 모습이 우습다. 누굴 미워하고 시기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좁은 마음에 내리는 경고들이었다.
이 계곡의 인적들이라곤 마을 주민들이 설치한 고로쇠 채취용 파이프가 전부이다. 때론 그 시설물들이 길잡이를 해주어 반갑기까지 하다. 그렇게 낮은 산죽밭을 지나 우측 지능으로 붙는다 싶으면 바로 이현상 아지트를 만난다. 오전 오름길과 다시 해후한 것이다.
합수내 삼거리에서 절터골에 머리를 박고 물을 한 모금 들이킨다. 그 맛은 그 옛날 파르티잔들이 허기를 채우던 물맛은 아니었다. 세 골짜기가 서로 만나 하나로 합쳐지듯 이제는 사랑하고 용서하고 감싸주며 함께 살아가라는 그들의 진정한 회한의 눈물과도 같았다.
함께하여주신 회원님들과 특히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신 만복대님께 감사드립니다.
「자료참조」
1989년 한겨레 신문 발굴 한국현대사의 인물
이태 남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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