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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후기/2004년

지리산에도 감춰두고 싶은 곳이 있다(세개골)

by 에코 임노욱 2016. 5. 19.

지리산에도 감춰두고 싶은 곳이 있다(세개골)

- 구름모자 -



 늦은밤 도착한 의신마을은 가로등만 처량하고, 밤하늘엔 산너머로 감춘 달 때문에 방향을 잃은 유성만 핑핑 떠돌아다닌다.
 대성동까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다하나 늦은 밤 허기를 달래지 못한 일행들에겐 무척이나 지루한 길이다. 게다 숲으로 들어버렸으니 길잡이라도 해주길 바랐던 별마저도 나뭇잎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 헤드렌턴 불빛 범위안의 걸음걸이는 어지럼증만 더해간다.
 대성동은 이미 장파하고 문닫힌지 오래, 찬물 한 모금으로 속을 달랜 후 서둘러 오늘의 보금자리를 찾아 오른다. 다행이 그곳의 샘은 아직도 훌륭하게 남아있다.
산속의 술이란 원래 끝이 없는 것이어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는 때가 있다. 특히나 저녘 먹은 술이 아침에도 깨지 않아 속을 긁고 있다든지, 아님 아침녘까지도 술을 푸다 산행을 시작한다든지 하여 걸음자체가 불안하고, 산을 오르는 자체가 즐거운 게 아니라 점점 부담스러울 때 말이다. 그럴 때 술 취한 몸뚱아리는 너와 나 모두에게 짐짝일 뿐이다.
그래서 요즘엔 차라리 모자란 듯하게만 가져가기로 했다. 다만 그 모자라는 듯한 양을 계량하는 것이 약간 문제가 되긴 했지만.

아침은 여느 때 못지않게 상쾌했다. 산속에서는 역시 퀴퀴한 텐트 속보다는 한디잠이 훨씬 더 우리체질에 맞는 것 같다.
이른 아침을 먹고 자리를 턴다.
계곡이 가까우니 들려오는 물소리가 싱그럽고, 하늘에 구름한점 없으니 발걸음마저 경쾌하다.
두 번째 현수교를 지나 100여미터 나아가면 길이 능선오름길로 바뀌는데 이곳에서 계곡쪽으로 들어서면 큰세계골의 시작이다. 물론 세석방향으로 200여 미터 더 전진하여 왼쪽으로 꺾으면 오솔길이 나오는데 예전 인가터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대성골 원류를 한번 건너 집터를 만난 후 2,30분을 더가서 큰세계골 본류와 다시 만난다. 세간 사람들은 이 길이 경사가 덜하여 편하고 체력을 비축할 수 있는 길이라 하지만 우린 그에 게의치 않고 계곡 초입으로 들어섰다.

계곡은 처음부터 원시적이다. 지난 몇 년 기상이변이라는 장마와 태풍에 변화된 모습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기는 하지만 예전의 모습이 얼마나 거대하고 아름다웠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집채만한 바위들이 계곡을 메우고 뿌리채 뽑혀 나온 나무들이 우리키보다 한길이나 높이 매달려 있어도 이 곳의 기운까지 날려버리기엔 역부족인 듯 싶었다.
길은 없는 듯 보이지만 성기지 않게 놓여진 바위위로 나름대로 질서는 있다. 바위를 직접 올라서야 하는 곳, 계곡을 건너가야 하는 곳, 비탈을 걸어야하는 곳, 바위 모퉁이를 돌아가야 하는 곳 모두가 이곳의 질서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묶여진 표지기를 의지해도 상관 없다.

마지막 우측 숲길이 끝나면 계곡이 우측으로 하나 나뉘고 이후부터는 계곡 길을 걷게 된다. 길은 갑자기 협곡으로 바뀌고 새끼줄에 꿰어진 굴비두름처럼 크고 작은 폭포들이 연이어 이어진다. 때론 제법 깊은 소를 만들어 우리를 반기기도 하고, 어느 곳은 요염하게 누워 우릴 보고 올라오라 손짓하기도 하고, 어느곳은 푸른 이끼옷을 입고 우릴 맞이하기도 한다. 다만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고로쇠 수액채취용 파이프가 이곳까지 올라와 있음이 눈에 거슬려 그져 혀를 내두를 따름이다.
그렇게 한가롭고 여유있게 오르다 마지막을 갈무리하는 것이 바로 대성폭포다.

이 곳은 대충 지형만 살펴보아도 예사 지형이 아니다. 양벽은 아주 좁은 협곡인데가. 바위지대여서 갑자기 하늘이 열리듯 나타나고, 그 뒤 영신대 방향으로는 암봉들이 막 피어난 연녹색 숲속에 우뚝우뚝 서있다. 폭포는 위엄있게 수직으로 떨어지거나 전체가 한 몸으로 비상하는 것이 아니고 4단으로 나누어 한땀한땀 100여 미터를 흘러내린다. 그뿐 아니라 중간엔 너른 반석이 있어 누구라도 쉬어가지 않을 수 없고, 물줄기도 기둥으로 소란스레 쏟아지는 게 아니고 여인네 치마폭처럼 넓게 펼쳐 바위면을 타고 내린다.

대성폭포를 지나면 계곡의 폭도 한결 더 좁아지고 수량도 현저하게 적어진다. 다만 다행인 것은 이곳부터는 영신봉의 선경을 바라보면서 오를 수 있다. 오월의 날씨로는 보기 드물게 청명하고 해발이 높아 주위 사물들은 저 아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봄기운이 가득하여 행복감이 절로 넘쳐난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또다른 지계곡이 또하나 갈린다. 일명 Y자계곡인데 우측의 실폭을 넘어가면 영신대 바로아래 샘터로 오르는 길이나 험한 편이다. 따라서 우린 좌측의 계곡을 잡아 오른다.

길은 계곡을 따라 계속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측 비탈로 붙는다. 비탈이래봐야 사방이 바위벼랑이니 너덜강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수목이 살수 없는 구멍이 숭숭 뚫린 너덜강이 아니다. 지난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바위엔 이끼를 붙여 덩굴 식물을 올리고, 바닥엔 떨어진 낙엽을 모아 흙을 만들어 제법 큰나무들이 자란다. 그렇게 자연은 해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

그렇게 오르다보면 어느 순간 불쑥 영신대가 나타난다. 영신대는 정말로 영험한 곳이다. 제단위에 모아놓은 신상神像들이 하나의 신의 모습이라면 이 주위엔 수백 수천의 신들이 가득하고, 그들이 있는 곳마다 영험한 기가 흐르고 있다면 이 부근 어느 터에서 기도를 한다해도 그 기운을 받는 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리산의 삼대 중 이곳이 가장 영험한 기운이 흐르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듯싶다.
영신대 앞의 바위에 올라 주위를 훓어 본다. 구상나무 아래로 대성골과 큰세계골이 아스라하고, 서편으로는 노고단, 반야봉 왕시루봉이 이곳을 향해 도열해 있는 듯 보인다.

지리산에 관한 고서들 중 이곳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 오래된 기록은 530여년전 성종때 형조판서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이다. 함양군수 재직시절 관동 조태허의 권유를 받고 지리산을 올라 기행문형식으로 적어놓은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된 글로서, 지금은 사라진 영신사에서 하루를 유하게 되면서 영신대 부근의 주변경치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곳엔 영신사라는 암자에 스님이 한분 기거하고 있다는 것과, 석가섭石迦葉,(돌부처)에 왜구가 칼로 내려쳐 만들어진 흠집을 보고는 “비록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돌부처)을 닮아 화를 당한 것”에 한탄한다. 뿐아니라 그 오른쪽 팔뚝의 화마 흔적이 미륵세계 도래에 관한 전설임을 알고 “본래 돌의 흔적이 그러한데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전포錢布를 바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통탄하고 있다.
또한 가섭전迦葉殿 북쪽 봉우리의 우뚝 솟은 두 바위가 좌고대坐高臺라 것과 법당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에 지리산 찬가讚歌가 있고 인장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 즉 안평대군의 작품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기록의 마지막엔 서북쪽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이 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섬세하고 매끄러웠으며 이 탑도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을 꿰어놓았는데, 이미 두어 층은 유실되었다고 세밀하게 적고 있다.

다만 지금은 이러한 흔적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터만 남아 있어 어느 때부터인가 이곳은 구도자들의 수행터가 아니라 신령스런 기를 얻고자하는 무인巫人들의 기도터로 변해버렸다. 하긴 우리같은 속인들이 느끼기엔 종교와 미신의 신념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단지 그것이 밥벌이의 수단으로 활용되는냐, 정신구양의 밑거름이 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우리에겐 그것 자체도 그리 중요치 않다.

시간이 있어 영신대 주위의 기도터들을 둘러보았다. 오른쪽 아래에는 김종직이 말하는 영계靈溪가 있고 그 옆에는 옥천玉泉이 있다. 또한 그 옥천 옆에는 돌더미를 쌓은 작은 제단이 있다. 이어 또 하나의 세상을 열 듯 바위틈으로 이어진 석문을 통과하면 또 하나의 작은 샘터가 있는데 이곳을 용왕당이라 부른다. 이곳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나타나고 암봉의 바로 앞에 좀 더 큰돌을 쌓아올려 모신 제단이 있다. 특이한 것은 제단 어디에나 푸른빛이 도는 타원형의 신상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모셔져 있다. 마당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서면 미륵불, 칠성당이라 불리는 곳이 나란히 있지만 관리공단의 감시로 인해 모두 하늘과 바위들을 배경으로 남아 있을 뿐 시설물은 아무것도 없다.

이른 시간이지만 영험한 기운과 함께 있으니 눌러 앉자 점심을 차린다. 오늘도 채 몇 분의 고생이었지만 먹고도 남을 만큼의 곰취와 참나물이 있다.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로 두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영신대에서 칠선봉을 향한다. 길은 연하고 철조망까지 둘러놓았지만 그것이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의 욕심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주능선을 만나면 “등산로아님”이라는 글자가 마치 “등산로 여기가 맞음”이라며 우리를 반기는 듯 보인다.
예서 칠선봉까지는 주능선이어서 스치는 사람들이 많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스치며 인사를 나눈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산에서까지 주종主從관계가 있어 사람을 마주치는 것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낀 어느 때부터인가 도망자처럼 지능과 숨은계곡으로만 찾아다니던 습성이 적응하지 못한 어색함이다.
능선 곳곳엔 사월중순 웅석봉 오름길에서 보았던 얼레지가 이제야 날씬한 허리를 펴고 양지꽃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칠선봉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작은세계골 초입에 일행이 모인 건 1시간정도 후 일, 올라오는 일행이 있어 인사를 나눈 후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선다. 길은 초입을 제외하곤 십여 년 전에 일어난 산사태로 보기 흉하리만치 패여있다.

산사태는 이 산의 아픔이자 상처이다. 아물기에는 너무 깊은 상처가 아직도 맨살을 그대로 들어내 놓고 있다. 신음소리마저도 멈춘 채......

계곡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여 어수선하고, 살아있는 돌들이 많이 있어 발걸음은 마냥 조심스럽기만 하다. 특히나 본인의 실수가 앞서 내려가는 선두에게 돌을 굴려 큰 누가 될 수 있으니 마음부터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사태는 거의 계곡의 반까지를 내려와 있고, 커다란 와폭을 만나면 어느정도 진정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계곡도 지리산 여느 계곡과 마찬가지로 고로쇠 파이프가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 있어 더욱 심란하다.

작은세개골은 따로 사람이 다닐만한 길이라 만들어진 곳은 없고 이렇게 사태지역의 돌무더기를 조심하며 내려서야 한다. 본래의 모습이 갖추어진 계곡을 만났다 하더라도 계곡 범위 내에서 내려설 수 있는 지점을 찾아 줄 곧 내려서기만 하면 된다.

계곡이 좌측으로 크게 도는 지점을 지나면 우측에 덕평봉에서 내려오는 지류가 합류하고, 이 부근을 지나면 고로쇠 파이프작업을 하던 텐트가 아직 주인을 잃은 채 남아 있다. 이곳을 지나자마자 좌측 비탈 조릿대사이를 자세히 보면 길이 하나 보인다. 이 길은 약 10여분 후 칠선봉능선을 오르는 지능사이의 폐가와 만나게 되고, 다시 계곡 본류와 합류한다. 따라서 능선을 밟지 않고 계곡을 계속 거슬러 내려가도 종내는 같은 길이다. 다만 중요한 건 다시 만나는 이 지점이 원대성마을을 갈 수 있는 포인트라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계곡으로 가지 않고 우측 지능을 밟아 올라가야한다. 길은 멀지 않고 등에서 땀이 채 베기도 전에 고개 마루에 당도한다. 이곳이 빨치산 최후 격전지로 관리공단에서 허용하는 등산로의 끝이며 여기에서 원대성마을까지는 한걸음에 내달을 수 있다.

지리산 마지막 파르티잔 정순덕의 실록에 따르면 그때의 토벌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52년 1월 17일은 지리산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그날이 저물면서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에서 토벌군에 쫓긴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쯤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눈 덮인 대성골은 빨치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빗점골 의신부락 뒤쪽에서 토벌대들이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는지 금세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 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동작이 빠른 지휘관이나 전사들은 토벌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포위망을 뚫고 나갔지만 대다수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 자빠졌다. 발에 걸리는 것이 시체들이었다. 하루종일 퍼부어 대던 포격도 총격도 해가 지면서 주춤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하늘에서부터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비행기 편대는 네 번 아니 다섯 번쯤인가 대성골 골짜기에 마개가 빠져 있는 드럼통을 삐라처럼 뿌리고 다녔다. 그러다 마지막 편대에서는 주먹만한 것을 골짜기 곳곳에 날려보냈다. 바로 소이탄(燒夷彈)이었다. 그 순간부터 하얀 눈으로 덮여있던 대성골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항공포와 야포사격으로도 부족해 휘발류에 소이탄으로 불바다를 만들었다니, 보지 않아도 절규하는 그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그들은 그렇게 이 땅에 태어난 걸 후회하며 숨져갔다.

두 가구가 있는 원대성마을은 대성골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삼거리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작은세계골로 5분여를 올라오면 만날 수 있다. 예의 보이는 한가한 산골풍경이라기 보다는 그 예전 파르티잔들과 국방군의 싸움에 희생만을 강요당한 슬픈 그림자가 가득 베어있다. 뿐만 아니라 반공 이데올로기 시대의 산물인 독가촌 철거계획에 의하여 모든 가옥들이 철거되었다가 이제야 두 가구가 새 터전을 잡았으니 그들의 한 많은 사연들을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대성골을 잡으니 세석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비로소 한 길에서 만난다. 계곡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흐르고, 길게 늘어뜨린 산그림자를 지붕삼아 대성동으로 바쁜 걸음을 옮긴다.
여기까지면 이제 산행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들러 가는 곳이니 그곳에서 배낭을 풀고 시원한 농주 한 사발을 거나하게 들이키며 턱을 훔친다.

뭐이네 뭐이네 해도 사람 사는 맛은 이런 것인가 보다. 고생 뒤의 보람, 갈증 뒤의 시원함.
그래서 세 개골의 전설은 슬픔만은 아닌가 보다.



연 두 주 산행을 함께하신 회원님들과 만복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