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주름 너머 1500년전 평등 세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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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중만이 차마고도(茶馬古道)를 품고 있는 중국 윈난성을 다녀왔다. 중국 남서부 오지인 윈난성은 영국 작가 제임스 힐튼이 이상향으로 묘사했던 곳으로, 김중만은 그곳 사람들의 삶과 자연 풍광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부산파이낸셜뉴스 창간을 기념해 마련한 이번 특별기획에는 중국 전문가인 박현 난징사범대 명예교수가 동행해 글을 썼다.
남조(南詔)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옛 나라의 발원지인 웨이산(巍山), 오늘날 이족(彛族)과 후이족(回族)의 자치현이기도 한 인구 40만명의 그곳 풍경은 무심결에 흥얼거리게 되는 입에 익은 음악처럼 늘 필자의 마음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수백년의 바람과 비를 견디면서 그 자리를 지켜온 고옥들이 즐비한 고성의 거리, 관광객이라곤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지만 옛 나라의 수도였음을 알려주는 거대한 문루, 오랫동안 내려온 제 민족의 옷을 입고 밝은 얼굴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오가는 후이족, 이족, 바이족(白族), 먀오족(苗族) 등 여러 갈래의 원주민들, 죄를 짓곤 쳐다보기조차 민망한 드넓고 푸른 하늘, 그곳에서 필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우습게도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새어 나온 음식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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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달고 맵고 시고 짠 다섯 맛이 어쩌면 그리 고르게 들어있는지 깜짝 놀랐다. 물론 차 맛이 쓴들 얼마나 쓰며 단들 또 얼마나 달까만, 너무나 잘 짜인 그 맛에 저절로 '호오'하는 탄성이 튀어나왔다. 나오는 음식은 반쯤 잊어버리고 차호에 거듭 뜨거운 물을 부어댔다.
'이 땅에 오신 밝은 태양'이란 뜻으로 '쉬누라(細奴邏)'라 불렸던 젊은이가 마치 옆에 앉아 즐겁게 웃으며 차를 따라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목동의 옷을 입고, '뛰'라 부르는 양치기의 피리를 들고, 자신이 양을 치던 산허리에서 길어온 맑은 물을 끓여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길손에게 마냥 즐겁게 차를 권하는 듯싶었다.
한편으로 차를 마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느낌, 눈앞에선 고성의 모습들이 차츰 사라지고 마침내 1500년 세월 전의 시원한 초원이 펼쳐지면서 양떼를 몰고 그 벌판을 뛰어다니는 젊은 목동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속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젊은 '쉬누라', 다른 목동들이 그의 노래를 들으며 하나둘씩 모여들어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광경, 그때 거기에서 마신 차는 분명 그런 광경을 느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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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들판에 한님이 오셨네. 우리는 모두 그이의 종이라네. 그분이 오시니 모두가 즐겁다네. 우레의 신도 바람의 신과 함께 오셨다네. 비의 신과 무지개의 신도 다투어 오셨다네. 별님들도 이곳으로 모여드네. 한님께서 오셨으니 이곳이 곳 바탕별(북극)자리. 우리도 어서 그곳으로 가야 하네. 가서 함께 목소리 높여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어제 딴 잣이랑 석류도 그이 앞에서 나눠먹을 거라네. 오늘 짠 맛난 양젖도 그이 앞에서 나눠 마시고 싶어. 나는 언제나 그이의 말씀을 지킬 테니, 한님은 언제나 나를 아끼시어 내 마음은 늘 기쁘기만 하다네. 한님께서 계시는 이곳은 밤이나 낮이나 내가 지키고 싶어. 많은 이가 찾아올 때면 내가 앞장서 그이에게로 모셔갈 거라네."
입에서 입으로 세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옛 쉬누라의 노래, 가락조차 떠오를 듯한 그 노래를 차 한 잔에 담아 삼키면서, "그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이 여기도 있나이다"라는 말이 목젖까지 차 올랐다.
쉬누라는 처음 남조나라를 세운 사람으로 원래 웨이산 기슭에 살던 목동이었는데, 동료들이 그를 추대하여 공동체의 지도자로 삼았고 뒷날 나라의 영역을 널리 키운 사람이다. 그는 모든 종족의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명제를 투철하게 실천했고, 지도자는 백성이 모든 것을 누린 다음에야 자신도 누릴 수 있다는 원칙을 몸소 실천했으며 음악과 춤을 사랑했고, 나라의 노예를 없애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도록 했다. 사람들은 한자로 그의 이름을 정양왕(正陽王)이라 불러 칭송했다. 그가 세운 이 원칙은 원 세조 쿠빌라이에 의해 남조의 후신인 대리국이 무너질 때까지 600년 가까이 나름대로 철저하게 지켜졌고, 이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이 지역의 토착문화는 주지 못해 안달하는 문화, 남녀노소와 종족혈통을 넘어선 융합을 지켜내어 인류의 미래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데가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1500년 전에 이미 왕국이 아니라 민국(民國)을 선언했으며, 무노예 무귀족주의를 실현했던 터전, 바로 이곳을 이번에는 김중만 사진작가와 함께 다시 찾았다. 어지럽게 개발된 작은 도시의 언저리를 지나 고성의 중심부에 들어서자 작가의 눈빛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눈빛보다 몸이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건물들을 담는가 싶더니 어느새 지나가는 노인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 세대에 속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고성의 희미한 그림자를 찾아내고 있었다. 그들 얼굴의 깊은 주름에서 종족 공존과 문화융합의 흔적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담아내는 순간 빛 바랜 수채화는 생기 가득한 유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그려내는 순간 마오쩌둥 세대의 고난을 간직한 얼굴들은 행복하고 당당했던 남조민국 사람들의 얼굴로 바뀌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고옥 마당의 키 큰 나무도 생기 띤 모습으로 그림이 되고 있었다. 그냥 사진이 화려한 게 아니었다. 작가의 화려함은 생기를 찾아주는 힘이었다. 작은 휴대폰(베가R3)으로 찍어내는 사진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쿠빌라이의 침략군에 털려버려 텅 빈 고성의 보물창고 성공루(星拱樓)는 작가의 사진 속에서나마 다시 보물이 가득해 보였으며, 북문인 공진루(拱辰樓)도 작가의 사진 속에서는 여전히 한 나라의 수도가 주는 위엄을 담고 있었다.
이 마을을 떠나면서 작가는 "이곳에는 아직도 역사가 살아 있다"고 했다. 작가에게 웨이산의 고성은 아직도 살아 있는 인류 역사 첫 민국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담아 가는 출사 여행,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한 필자에게도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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