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넘고 물건너 낯선 땅, 낯선 사람들과 뜨겁게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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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걸어보자, 말들과 더불어 그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출 일도 없을 터, 이건 정말로 한바탕 즐거운 여행길. 드넓은 분지도 가로지르고, 드높은 뫼도 넘어주며, 거칠게 흐르는 물길도 건너가서, 낯선 땅 낯선 사람들과 뜨겁게 만나리라. 어찌 대지는 이다지도 넓을까. 하늘엔 오늘의 태양이 힘차게 빛을 뿜고, 어제의 별과 달도 부드럽게 밤을 밝힌다.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은 그곳에 낙토가 있다고 들은 적 있지. 그곳에는 차맛 같은 사람들만 산다든가. 그래 무슨 일이 생겨도 좋아, 그건 내가 다 즐겁게 받아줄 테니."
차마고도를 따라 기나긴 여행길에 오르는 마방 사람들이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의 한 구절이다. 하루에 짧게는 50리, 길게는 100리를 다니며 낯선 곳을 고향 삼고 낯선 이를 벗 삼아 살아가던 그들의 주된 무대는 사실 길이 아니라 장터 또는 장이 서는 마을이었다. 길을 가는 일은 그런 거점을 이어가기 위한 그들의 예비 작업쯤 될 것이다.
윈난성의 다양한 소수민족들은 마을에 이런 장이 서는 것을 일러 '깐지'라 부르고, 이런 장이 열리는 길목을 일러 '깐까이'라 부른다. 오늘날 윈난성의 작은 마을 이름들 가운데 양까이(羊街)나 니우까이(牛街) 같은 것들이 많은데, 이 또한 양을 주로 거래하던 장터나 소를 많이 거래하던 장터에서 연유한 이름들이다.
또 이런 장은 차마고도에 있는 이름난 사당이나 마을 안의 광장에서도 열렸는데, 먀오까이(廟街)나 쓰팡제(四方街)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또 장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길에서도 열렸으니, 윈난성의 가장 큰 장터로서 오늘날에도 해마다 음력 3월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다리(大理)의 싼웨제(三月街)가 그런 곳이다. 새로 큰 마을이 들어서면 새로 장터를 두고 장을 세우기도 했던 바, 이런 곳은 새로운 장터라는 뜻에서 흔히 신까이(新街)라 불렀다.
장날을 앞두고 마방들은 하루 앞서 그 마을을 찾아왔다. 누군가는 먼저 도착했고, 누군가는 나중에 도착했다. 그러면 먼저 도착한 행렬의 사람들이 그 재주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그들만의 악기를 연주하면서 술잔을 들고 나중에 도착하는 일행들을 흥겹게 맞이했다. 그렇게 어둠이 올 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맞이했고, 이 과정에서 문화와 문화는 서로 섞이면서 차마고도를 문화의 대동맥으로 만들어갔다. 서로 면식이 있고 없고는 이런 마당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언어가 다른 것도 문제되지는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이해하려 애쓰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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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서는 곳이 상대적으로 작은 마을이어서 숙소가 마땅치 않을 경우에는 그 앞마을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해 장터를 찾았다. 장터에 도착하면 먼저 자리를 잡기 전에 자기 마방의 깃발을 그 장터의 가장 높은 곳에 높이 세웠다. 마치 오늘날 운동경기에 걸리는 만국기처럼 말이다. 그래서 장은 열린다고 하지 않고 우리 옛사람들도 그렇게 표현했던 것처럼 장이 선다고 했다.
그리고 장이 파하면 다음 날 열릴 장 마을을 향해 이른 오후부터 길을 재촉했고, 그다음 마을에서도 문화가 서로 섞이는 놀이판과 잔치판이 벌어졌다. 이제 어떤 행렬도 다른 행렬의 특징을 알게 되고, 다른 행렬의 음악 한두 가락쯤은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행렬의 음식 한두 가지도 만들 정도가 됐다.
마을 장터에 장이 서는 날이면, 그 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마을들에서도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이날은 물건을 거래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새로운 소식을 나누며 공론을 만들어가는 날이기도 했다. 모두가 나름대로 잘 차려입고 장터에서 만나 반나절을 보내면서 저절로 그런 과정을 만들어가곤 했던 것이다.
출사 여행 중에 이런 장이 서는 광경을 만났으면 했는데, 마침 김중만 사진작가와 함께 뤄덩 마을을 찾는 길에서 작은 '깐지'가 열리고 있었다. 조금은 불만족스럽게도 그날의 장은 너무 작았고, 전통적인 성격도 약간은 퇴색이 되고 있었다. 이미 전통 복색을 한 사람들보다 오늘날의 생활복을 걸친 사람이 많았고, 거래하는 물건에서도 개성을 갖춘 것들보다는 현대 공업의 결과물들이 더 많았다. 차마고도는 이렇게 문화대동맥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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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맛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예술가의 눈은 날카롭고 섬세했다. 나름대로 말끔하게 차려입고 장터를 찾은 소수민족들의 모습이 작가의 카메라에 빨려들기 시작했다. 산촌의 농가에서 나온 물건들과 이름 없는 작업자의 물건들이 개성을 담은 채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어수선한 풍경 안에서도 장터의 질서가 그림 위에 그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의 옷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즐거움과 긴장감을 함께 담은 그들의 표정이 장날의 의미를 그려내고 있었다. 머리에 진 바구니는 물건을 거래하러 왔다고 이야기했으며, 나름대로 차려입은 옷은 그곳이 사람이 최대의 성의로 사람을 만나는 공간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아침에도 석양빛이 비치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작가의 사진이 되어갔다.
필자는 그 모습들을 통해 작가가 아직도 차마고도가 살아 있는 문화대동맥임을 이야기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우리들의 세상에서 무엇이 문화대동맥이 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짐작한다. 아울러 어떻게 다시 차마고도와 같은 거대한 문화 고속도로를 놓아갈지 묻고 있었다고 믿는다.
aragaby@hanmail.net 박현 난징사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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