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치솟은 돌담, 햇살 머물자 경계심 허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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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5일 세 차례 연재된 '김중만, 차마고도를 가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한 컷 한 컷 깊이가 느껴지는 김중만 작가의 사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박현 난징사범대 교수의 글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듯하다. 전편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이야기를 '김중만, 차마고도를 가다Ⅱ'라는 타이틀로 두 차례 더 연재한다.
기나긴 차마고도에서 중심적인 길은 결코 좁지 않다. 그 길은 양쪽으로 짐을 실은 말들이 서로 지나갈 수 있는 넓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표국이나 마방이 한 번 길을 나설 때 적으면 열 명, 많으면 백 명이 넘는 사람이 무리를 짓곤 했다. 때로는 중간에 길을 나누기도 했고, 때로는 다른 일행과 합류하기도 했다. 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문적인 호위 인력들이 그 무리에 포함되는 일도 빈번했다.
먼길을 떠나온 마방들을 통해서만 차를 마실 수 있었기에 소금과 마찬가지로 차는 늘 귀하고 비싼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중간에서 가로채려는 불량배가 적지 않았고, 그들은 때로 꾀를 쓰기도 했지만 대개는 힘으로 차와 소금을 뺏으려 들었다. 호위무사들의 등장은 바로 이런 일에 대비하려는 마방 상인들의 필요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들 호위무사는 상인이 아님에도 늘 마방 행렬의 앞뒤에서 기나긴 길을 함께 다니거나, 때로는 특별하게 위험한 구간만 따라다니며 지켜주곤 했다. 그들도 차마고도가 길러낸 또 한 부류의 직업군이었던 셈이다. 마방의 호위무사로 몇 년을 따라다니다 그 실력을 인정받을 경우 중간급 이상의 군인이나 치안 담당으로 발탁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건장하지만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마방 호위무사는 선망의 직업이기도 했다.
이런 호위무사들의 무력 수준은 당연하게도 불량배들의 폭력 수준보다 높아야 했고, 이들의 실력을 책임지고 길러줄 학교도 있어야 했다. 자기 수양과 의협심을 중시하는 무협소설의 무사들과 그들의 방파는 사실 이런 호위무사나 무술학교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지킬 만한 재물, 호위무사를 고용해도 될 정도의 높은 이윤, 그들을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험난하고도 먼 길, 그것이 바로 차마고도였던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주요 무협방파, 즉 호위무사 양성을 위한 주요 학교의 70% 이상이 차마고도 언저리에 있었다. 차를 싣고 중국 역대 수도를 향해 가던 길목이나 멀리 서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꽤 이름이 난 이른바 메이저급 무술학교로는 오늘날 신장성 입구에 있던 곤륜파, 신장성 동부에 있던 청성파, 쓰촨성 북부에 있던 공동파, 윈난성 다리의 점창산(点蒼山)에 있던 점창파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학교들이 양성한 호위무사를 직원으로 거느리거나 계약 고용을 하는 마방은 규모가 큰 편이었다. 예를 들어 화폐 개혁이 진행되기 전 중국 10대 부호에 속했던 시저우의 4대 상업조직 즉 옌씨(嚴氏), 양씨(楊氏), 둥씨(董氏), 자오씨(趙氏) 등이 그런 경우였다. 특히 한꺼번에 3000명의 직원을 거느렸으며 전근대 중국의 최대 부호였던 옌전샹(嚴珍祥)의 상업조직은 점창파 무술학교의 가장 큰 고객이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을 경우 무술 수준이 낮은 호위 인력과 함께 길을 떠나야 했으며, 규모가 더 작을 경우 자신의 행렬은 자신이 지켜야 했다. 크고 작은 마을 단위에서 공동체적으로 조직한 마방이 대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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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크고 작은 마방 행렬이 마을로 들어서면 그 마을은 한바탕 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화폐와 물건이 돌기 시작하고 장마당이 커지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를 쓰고 교류와 거래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 마을의 치안 조직들이 더 긴장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오랜 교류의 경험을 통해 잘 교육된 마방 사람들보다 이들의 물건을 노리고 찾아드는 외지 불량배들과 북적이는 틈을 노리는 외지 절도자들이 그 근처에서 기회를 노릴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마고도의 중심지역 가운데는 두루마리로 만든 여행증명서, 즉 여권을 검사하여 도장을 받도록 하기도 했다. 여행증명서의 이름이 아직도 '여행자의 두루마리'라는 뜻의 여권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시기의 옛길문화가 남겨준 흔적이라 할 것이다.
마방이 지나가는 주요한 길목들의 마을들은 모두 부유했고, 평범한 민가들도 나름대로 지켜야 할 재물이 있었다. 재물이 있으면 그 재물과 관련된 사람들도 그 재물만큼은 불안한 것이어서 이런 지역의 민간 가옥들도 이런 불안을 덜기 위한 방식으로 지어졌다. 주지 못해 안달할지라도 뺏기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또 그런 집안일수록 식구 수도 많아야 했고 따라서 방의 수도 많아야 했다.
그 결과 웨이산과 다리, 시저우 등 주요한 지역의 가옥들은 모두 3면으로 2층 또는 3층짜리 방을 짓고, 남쪽이나 동쪽의 남은 한 쪽에 높은 해받이벽을 지었으며, 그 사이의 동남방으로 집에 어울리지 않는 작고도 두꺼운 대문을 두었고, 그 안에 대리석 돌판을 깔고 그 위에 아기자기한 정원을 꾸몄다. 이것이 기본 구조인데, 세 방향으로 방들이 있고 한 쪽에 해받이벽이 있다 하여 이를 통칭 삼방일조벽(三房一照壁)이라 부른다.
그런데 어떤 집은 이런 구조를 이중화하여 규모를 키웠다. 방들이 여섯 쪽으로 나뉘게 되고, 정원은 두 개가 된다. 이런 경우는 여섯 채가 하나로 모여 같은 하늘을 본다는 뜻으로 육합동천(六合同天)이라 부른다. 문화대혁명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완전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옌전샹의 가옥은 이런 구조가 너무 중첩되어 집안에 갇힌 정원이 무려 10여개에 이르렀기에 어떤 형식으로도 부르지 못하고 그냥 큰집(大院)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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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어심을 보완하기라도 하려는 듯, 삼방일조벽의 집들은 매우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 그 미감을 필자로서는 짧은 지면에 형용할 길이 없다. 키가 큰 정원수, 예술가의 흔적으로 채운 해받이벽, 단아하게 조각한 붙박이 돌화분, 살짝 늘어진 곡선미의 지붕, 돌을 다듬어 마무리한 아늑하고 우아한 마당, 울림소리를 내지만 단단하게 안배한 나무계단 등이 고작이다.
이런 집들을 보면서 김중만 작가는 먼저 아름답다고만 했다. 필자가 미처 이런 집들이 지어진 연유를 옮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필자도 작가의 눈을 따라 사회문화적 각도를 버리고 그 아름다움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고옥을 비추는 햇살이 더 넉넉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방어심과 경계심을 녹여내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작가의 눈은 빨랐다. 아름다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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