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을 걸으며 입암산
- 구름모자 -
1. 일시 : 2004.12.11~12
2. 장소 : 입암산
3. 참석 : 종신, 신배, 선자, 정하, 병옥(잠만 자고 감)
4. 산행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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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비가 오더니 오늘은 날이 흐리고 거센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젠 오락가락하던 겨울이 완전히 문턱을 넘어 섰나봅니다.
오늘 이 곳을 찾고자 한 건 순전히 나의 욕심이었지만 어제 저녁부터 함께한 동지들이 저리 좋아하는 걸 보면 나만의 욕심은 아닌 듯 합니다.
입암(笠巖)이란 ‘갓바위’란 뜻이니 정상 서능에 뚜렷하게 보이는 바위를 이르는 말입니다.
호남의 너른 평야에서 바라다 보이는 이곳 산세들은 자못 험준하여 갈재를 중심으로 서로는 방장산, 동으로는 입암산과 내장산이 하늘을 향해 기운차게 솟아 있지요. 그러나 이곳이 입압면인 걸 보면 아마도 이곳의 주산은 입암산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 됩니다.
문헌을 찾아보니 풍수에서 입암산(笠岩山)은 토(土)이고, 방장산(方丈山)은 금이며, 비룡산(飛龍山)이 수(水), 국사봉(國師峯)이 본체 즉 목(木)의 형국이고, 내장산 (內藏山)이 화(火)로 5행이 상생(相生)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산세의 음양 조화가 뚜렷한 곳이라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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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암산을 오름길을 택하는 건 남창골 이지만 오늘 우린 언제나 그렇듯이 만화저수지에서부터 오릅니다. 이 길은 입암산성 북문으로 직등하는 길이지만 경사가 급해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길이 우리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새겨진 길이지요. 오름길에 있는 조그마한 폭포도 예쁘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건 우리가 오름 짓의 욕심에 목말라있을 어느 한 때, 저 멀리 겨울나무 사이로 끝머리만 살짝 보이는 하얀 기둥을 확신도 없이 무작정 찾아들어간 적이 있었지요.
그렇게 쇠잔한 넝쿨을 꺾고 나무기둥을 넘으며 벽으로 다가간 우리 앞에 갑자기 거대한 은벽 하나가 마치 철옹성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있었습니다. 우린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다 찾아낸 보물섬의 입구라도 만난 양 흥분하였고, 그해 늦은 겨울 끝내 기회를 맞추어 초등을 이루어 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새롭습니다.
참 오늘에야 알았는데 오름길에 있던 폭포 옆 좌측 아래쪽은 오래전 절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전엔 관심이 없어서였는지 그저 스쳐지나갔었지만 지금 자세히 보니 터를 만들었던 석축이 완전하게 남아있고, 누구의 손길인지 돌탑 서너기가 정갈하게 쌓여 있군요.
겨울비가 온 뒤 바람마저 차가워 날씨도 을씨년스럽고, 오름길의 경사도 제법 급하여 일행들의 마음에 조바심이 일 듯도 하지만 내 스스로는 이 산만큼은 웬만큼 아는지라 그리 걱정할 일도 없이 선두에서 내쳐 올라갑니다.
그렇게 오름길이 마친다 싶으면 바로 북문 앞입니다. 지금이야 성문의 흔적도 없지만 그 예전엔 나라님의 부름을 받은 이름 없는 군졸들이 긴 창을 들고 성문을 지키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사실 이곳을 올라오면서 느낀 점이지만 북쪽으로는 굳이 애써 지킬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굳이 성을 쌓지 않아도 주능을 중심으로 단애가 형성되어있어 성 외곽을 이루는 천혜의 요건을 갖춘데다가, 실제로 이 단애를 기초로 성이 올라갔으니 아마도 기초지반이 부실하여 성이 허물어 질리는 없을 듯 합니다.
뒤따라 올라온 일행들과 입암산 정상을 뒤로 한 채 갓바위 쪽을 향해 갑니다. 듬성듬성 새로 복원된 성이 있는가 하면 아직 나랏돈이 미치지 못하여 허물어져 흘러내리는 성곽들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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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성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이 부근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산성의 처음 축성은 이미 삼한 시대로 밝혀졌고, 후백제의 견훤이 중요한 요새로 삼았다고 전해지지만, 기록에 기초한 최초의 항전기록은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몽고 항쟁기록입니다. 1256년(고종43년) 몽고 6차 항전에 왕명을 받은 송군비 장군이 계략을 짜서 몽고군을 이곳에 끌어들인 후 크게 무찔렀다는 기록인데 이를 근거로 한다면 이 성은 그 훨씬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임진란에 장성현감 이귀가 장성출신 윤진과 더불어 개축하여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였다가 정유재란에 산성별장이었던 윤진이 소서행장예하부대의 북상을 막고자 관군, 의병, 승병 등과 창칼로 맞섰지만 왜놈들의 화력에 무참히 짖밟히어 장열히 순절하였던 곳입니다. 지금도 산성 안에는 윤진장군의 순의비가 잡초더미 속에 말없이 덮여 있습니다.
그 후 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정에서 몇 번의 증 개축과정이 있었고, 한때 이곳에는 포루4, 성문2, 암문3, 여울1, 연못9, 샘물14기가 있는 큰 성이었다 합니다. 또한 성내 건물로는 갓바위와 동서남북에 각각 포루가 있었고, 객사와 누각, 그리고 그 좌우에는 월랑이 있었다합니다. 뿐만 아니라 공남루, 유중사, 장경사(속=장성사) 흥경사(속=흥덕사), 인경사(속=태인사), 옥정사(속=정읍사), 고경사(속=고창사) 등 누각과 사찰이 있었고, 거안관, 안국사, 진헌과 장성, 정읍, 태인, 고창, 흥덕 등 5개 고을의 무기를 보관하는 군기고 5개와, 군포고 7개, 그리고 위 고을과 광주, 나주 등 7개 고을의 군량미가 쌀, 콩, 벼를 포함하여 12,296석이나 저장되어있었다 합니다. 따라서 이 성은 담양의 금성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겠지만 이곳이 방치된 건 동학혁명 이후였답니다. 전봉준 장군이 한양입성을 위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중 외세를 빌린 관군과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회복하지 못하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평소 친분이 있던 산성별장 이종록을 찾았던 것이 빌미가 되어 별장은 처벌을 받고, 그 후부터 산성이 방치되어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산성의 역사를 되짚어 보니 중과부적의 격랑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외세에 맞서 싸우던 선현들의 피땀어린 장소가 문걸어 잠그고 귀어둡고 눈어두어 세상물정 모르고 쌈질하는 사이 왜놈들의 터가되어 선열의 피를 앗아갔던 역사의 아이러니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서둘 일도 없이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새 갓바위 정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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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거친 숨소리로 산모퉁이를 스쳐지나가지만 우리가 서있는 갓바위 정수리만큼은 바람이 비켜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 소리는 뜻 모르고 내몰린 민초들의 그때 함성인 듯하여 마음이 시려옵니다. 되풀이하여 걷지 말아야할 우리들의 소명이라는 걸 말하는 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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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조망은 참으로 기운차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동쪽으론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호남정맥의 산 내장산 줄기가 솟구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불쑥불쑥 솟아올라 백암에 이른 후 숨을 한번 고른 다음 추월, 용추, 강천산으로 내려갑니다.
서쪽으로는 예전에 노령산맥이라 부르던 영산북기맥(가칭)이 방장산, 문수산, 구황산을 지나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더니 불갑산에서 방향을 틀면서 허리를 낮추어 군유산, 월암산으로 꼬리를 물고 내려가 서해로 잦아듭니다.
남쪽으로는 백암에서 가지를 친 영산지맥(가칭)이 병풍산에서 크게 한번 솟은 후 짧은 맥을 다하고, 북쪽으로는 두승산이 변산반도와 한 몸으로 이어져 호남의 넓은 뜰과 곰소만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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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미있는 예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국도 1호선과 호남선철로, 호남고속도로등 우리나라 대동맥이 줄줄이 지나가는 고개에 관한 이야깁니다.
원래 ‘갈’이라는 의미는 고어로 ‘을’을 의미하기도 하고, ‘목마름(渴)’,이나 ‘칡(葛)’ 또는 ‘갈대(蘆)’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지명은 갈재, 또는 추령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노령이라 부르기도 하여 고개 하나에 여러 가지 이름이 명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보다 내가 아는 이 고개 이름은 가래재라는 흥미 있는 명칭이 있었습니다.
장성땅 몽란마을 가래(갈애)바위 아래 절색이었다는 주막집 딸 가래, 절색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뭇 사내들의 심금을 울려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그들의 일생을 망치게 되고, 그 소문이 한양에 까지 퍼져 임금까지 분노케 했다는 그녀는 끝내 어명을 받고 출두한 장수의 칼에 죽음을 맞이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억울함을 못 이겨 일그러진 표정으로 숨을 거두자 바위의 형상이 바뀌었다는 군요, 그 후 고개는 가래처녀의 한이 담긴 개래재였다가 세월과 함께 흐르면서 언젠가부터 갈재로 변형이 되었고, 지금은 그 흥미 있는 전설의 의미는 어디로 사라진 채 한문으로 옮겨지면서 추령이니, 노령이니 하는 뿌리 없는 이름이 되어버린 그 재를 바라보며 고개만 갸웃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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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하늘을 뚫고 새어나오는 빛줄기가 먼발치의 인간세상에 뿌려지는 풍경이 신비롭기만 합니다. 은선동 내려가는 길은 지난 가을의 잔영들이 가득하여 고즈녁하기만 합니다.
입암들에서 바라보는 입암산의 하늘금은 형세가 가파르고 절도가 있는데다가 갓바위와 거북바위 등의 형상이 선명하여 오르기 험한 바위산인 듯 보이지만 기실 그 안으로 들어와 보면 이렇게 편안한 곳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계곡 안쪽은 기복이 거의 없고 경사가 완만하여 이른 아침 아무런 상념도 없이 홀가분하게 걷게하는 산책로의 느낌이 드는데다가 어제 내린 겨울비가 계곡의 단란함에 흥을 돋구어 발걸음 마저 가볍습니다. 게다가 물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갈잎은 지난 가을의 애잔함이 묻어있고 대학연습림으로 지정된 40년 역사의 삼나무 숲은 이국적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분위기에 취해 아름아름 걸어오던 길이 어느덧 삼거리를 만납니다. 산성골이 합하여 남창골 본류가 시작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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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은 입암산성과 관련이 있는 지명인 듯 합니다. 그것은 우리고장 무주의 적상산에도 산성을 중심으로 서창과 북창마을이란 자연마을이 있는데 이 모두 성과 연계된 창고라는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곳 역시 ‘남쪽의 창고(南倉)’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장성 새재너머엔 북창골이 있음을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린 다시 산성골을 걸어 오르기로 했습니다. 이곳까지 와서 성 내부를 보지 않고서야 어찌 입암산성을 예기할 수 있겠습니까?
날은 을씨년스럽지만 시간도 한량없이 남아있으니 급한 마음도 사라지고, 설렁설렁 계곡을 거슬러 남문에 닿습니다.
산성골 자연수로를 이용하여 정갈하게 쌓아올려진 남문은 아마도 근래에 다시 복원된 듯 단정한 모습으로 우릴 맞이합니다. 성문 안쪽은 갑자기 새 세상이 열린 듯 넓어지고 성 입구 와폭엔 무심한 물줄기만이 시커먼 바위를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이곳에서 찬기운을 피해 조촐한 중식을 마칩니다. 조촐하다함은 오늘 함께하는 인원도 그렇지만 이렇게 한가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언제나처럼 배낭 한귀퉁이에 숨겨진 반주 한 잔도 없었다 함이요, 평소 내 등판에 매달려 다니던 배낭도 오늘따라 놓고 온지라 우리가 말하는 비상식량이 없는 허전함입니다.
다시 물길을 따라 오솔길을 오르면 커다란 분지가 나옵니다. 이곳에 도착하면 왜 이곳에 성이 들어섰는지, 이곳이 왜 천혜의 요새였는지, 또한 이곳의 쓰임이 무엇이었는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학란 이후 군사들이 내려가고 주인이 없던 근세에 이곳은 유교의 부활을 꿈꾸는 갱정유도의 신도들이 살았던 일명 성내(城內)라는 마을터입니다. 예전엔 성을 지키던 군사와 건물, 사찰이 수두룩했을 그 너른 터엔 지금은 침략과 방어의 오금저리는 긴장과 창칼이 부딪치는 격렬함은 느낄 수가 없고 주인 잃은 확돌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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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정유도를 꿈꾸던 유림들이 푸른 학이 사는 신세계를 찾아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곳은 우리나라에 세 곳이 있었지요.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지리산 삼신봉아래 청학동이요, 또한 군데가 내변산 신선봉아래 대소골이고, 바로 이곳이 그중 한 군데였었지요. 물론 지금은 경제와 개발의 논리에 밀려 신선의 마을이 아닌 범인들의 나들이 장소가 된지 오래고, 그나마 이제는 지리산 자락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특이 촌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다 해도 그 모습은 불과 1세기 전 우리네 모습인데, 아직도 갓을 쓰고 상투를 틀고 훈장님 앞에서 하늘천 따지를 배우던 그들이 신기하다는 듯 이방인 취급하는 것은 그들의 눈에서 보면 오히려 우리들이 더 희한한 모습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변한 것이 우리이고 그들은 그 때 그 모습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논리도 이제는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한때는 사람이 찾아오는 것 자체가 거부반응이었었고, 사진을 찍는 일마저도 불쾌하게 생각했던 외골스런 고집마저도 퇴색되어 이제는 뭇 관광객들을 끌어 들여 배를 채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예절과 천자문을 가르치는 정당성으로 포장은 되었지만, 찻길이 넓혀지고 사람이 밀려오는 건 도시의 그 무엇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듯 느껴집니다. 북문터를 다시 만나건 불과 30분만이었습니다.
아직도 처음처럼 바람도 그대로요, 하늘도 그대로요, 마음도 그대로인데 시간만이 우리 곁을 훌쩍 지나가 버렸군요.
그러나 오늘은 그 시간이 아깝지 않고, 모처럼 만에 느껴보는 여유와 생각의 공간이 많아 기분마저 상쾌한 기분 좋은 산행 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전에 숨을 고르며 올라왔던 길을 한달음에 내려가 저수지 옆 부인(富人)의 호화가(豪華家)를 돌으니 계절을 잃은 황매화가 붉은 꽃망울을 열었다가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저 꽃은 신들의 영역인 계절마저도 인간으로 인해 변해가는 세상을 원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성미 급한 자신의 소갈머리를 원망하고 있는지...
아직도 시간이 지천인 오후 하산주를 예기하며 산속의 일정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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