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온다
- 구름모자 -
늦은 저녁 행여하며 찾아 온 국골 하류는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계곡 물소리가 적막한 고요와 다투고 있을 뿐 눈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언제나 여유있는 터로 우리를 맞는 보금자리에 텐트를 설치하고 모닥불을 지펴 밤을 지센다.
산꾼들이 모였으니 술이 빠질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권커니 잦커니 몇 순배를 돌리다 보면 자연 눈꺼풀이 무거워 진다.
새벽이 물러나고 아침이 왔는데도 계곡 안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듯 우중충하다.
행장을 꾸려 앞으로 나서지만 돌밭이 천지인 오름길을 프라스틱 이중화로 걷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기 이를데 없다.
언젠가는 아니 저 위 어디쯤엔가는 겨우내 내린 눈이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마음을 달래 보지만 그것은 가난한집 제삿날 떡시루 기다리는 꼴이다.
아무리 지난 겨울이 기상이변 이었다지만 이 계절 초암릉이 이렇게 초라할 수도 있단 말인가?
느껴지는 실망감 보다는 가슴을 파고드는 허전함이 찌뿌린 날씨만큼이나 쓸쓸하게 다가온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순환하여 제자리로 왔다하여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난 시간이 그렇고, 그 시간내내 나고, 피고, 지고, 그것들을 향유했던 것들이 현재 우리 눈 앞에 보이지 않을 뿐, 그들은 이미 변화의 순리를 쫒아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영원한 내 소유물도 없다. 나에 것인 듯 하지만은 잠시 내 안에 머물러 있을 뿐 그것에 집착하면 오히려 불행해질 뿐이다.
비록 저 나무들이 지금은 벌거벗은 나목으로 맞파람에 떨고 있지만 푸른 옷을 입고 지냈던 지난 여름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진 것에 대한 집착보다는 베풀어야하는 대상을 고르지 말고 베풀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아야 새봄 다시 움을 틔우는 이치와 같다.
하늘은 기어이 비가 뿌린다. 눈이었으면 하던 마지막 가진 실낱같은 희망까지도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집착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는 듯 미련을 갖지 말라 이른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곳에 올랐을 지라도 그 것에 집착하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지리산에서 만난 어떤이가 물었습니다
“지리산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
“네~ 제가 다녀본 중에선 남부능선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래요? 전 칠선이 제일 좋던데”
“조용하기론 샛골과 도장골이 일품이죠”
그 젊은이가 저에게도 눈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대답했습니다
“전 초암릉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뒤에서 어떤이가 말했습니다
“지리산은 다 좋아요”
그 젊은이는 “그래도요”라고 재차 물었지만 난 한동안 무엇에 얻어 맞은 듯한 멍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사람 말이 맞았습니다. ‘어디가 꼭’이라는 편견은 우리가 만들어낸 조잡한 생각에 불과합니다. 집착은 생각을 좁게 만들고, 편을 나누게하고, 타협을 모르게 합니다.
비가 내리지만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고어택스 오버트라우져 걸치는 게 전부인 것이다.
이 계절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가는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내리는 비를 맞지 않으려 애쓰기 보다는 보호하려는 본능이 더 이롭다. 어차피 거스를 수 없을 바에야 순응하며 살아가는 게 삶의 이치 인 것이 이십 오년 산에 다니면서 깨치게 된 것 중 유일하다.
그 많은 세월 산을 다니면서 난 무엇을 느끼며 올랐던가? 혹여 그 세월 동안 난 산에게, 그 산속의 동물들에게, 저 말없이 서있는 나무들에게, 아니면 나를 스쳐갔던 사람들에서 죄를 짓지나 않았을까? 하긴 내가 선자(仙者)가 아닌 바에야 그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죄를 지었다는 의미와 다를 게 또 뭐 있으랴?
나의 허물을 덮어주려는 듯 개스가 눈앞을 지나가고 있다. 자책하지 말라는 듯 바람이 나를 아우르고 나무가 파르르 손짓 한다. 하봉의 저 바위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중봉으로 방향을 튼다.
그나마 남아있는 잔설은 거므튀튀하게 지난 겨울을 담고 있다. 아니 지난 가을의 기운도 녹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은 현제지만 한번 더 깊게 생각하면 과거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지저분한 색깔을 하고 있다. 마치 우리 내 인간이 잊어야할 과거를 붙들어 놓고 매달려 있는 꼴이다. 한심스럽게도...
중봉 야영터.
비바람 속에 텐트를 친다. 고생스럽긴 해도 단단하게 고정을 시켜놓아야 꿈을 꿀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는 곳이다.
밤새 까불러대던 비바람은 새벽녘에 들어서야 잦아 든다.
모처럼만에 봄기운 가득한 태양이 떠올라 양지쪽에 서면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온다.
모처럼 맞는 한가로움을 어제저녁 내 수렁 속에서 고생했던 물기를 말리느라 분주하다. 매트며, 침낭, 옷가지, 장갑, 양말까지 펼쳐놓으니 마치 인도 갠지스 강가의 빨래터 같다.
혼자 지키고 있는 텐트는 지나가면서 힐끔거리는 눈길이 따가워 괜시리 몸이 움츠러든다.
혼자든 둘이든 아니면 단체에서 온 무리든 산에 들면 저리 좋은 모양이다. 지리여서 더 좋은 모양이다. 배낭이 크건 작건, 나이가 많건 적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가 다 웃고 있고, 예까지 온걸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모든 운동이 그만큼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나면 피곤하여 눕고만 싶은 게 인간의 생리인데 저들은 오히려 더 생기가 넘쳐난다. 아마도 저들이 집에 가면 피곤하기 보다는 쌓였던 피로가 풀려 상쾌하다 할 것이다. 기분 좋아 할 것이다. 머물고 갈 부질없는 세상에 집착같은 좁은 생각은 없앨 줄도 알 것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없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즐겁다
때론 그것이 거창한 명상이나 수행이 아니어도 좋다. 그져 저 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것, 여기가 아닌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일상의 권태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 들을 생각하고 있다면, 적어도 산 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허식과 체면, 시기하는 마음, 부끄러움까지도 죄다 벗어던질 수 있어야한다. 곧추선 어깨, 장승같은 목, 부라리는 눈도 모두 다 누그러뜨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애기하는 편견, 시기, 곡해하는 말들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이라 생각하자.
모닥불은 타오르고 또다시 밤이 깊는다.
누가 뭐라 해도 봄은 온다. 우수 경칩이 먼 날짜에도 이미 봄은 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오지는 않는다. 올 듯 말 듯하면서 멈칫멈칫 온다.
그제는 비가 뿌리고 어제 밤에는 눈이 뿌렸다. 적은 양이지만 비박을 즐기던 사람들이 혼비백산 텐트속을 찾아 들어갔고, 주위를 제법 하얗게 덮어 놓았다. 그렇게 줄 듯 말 듯, 내놓을 듯 않 내놓을 듯 하다 오는 게 봄이다. 그래서 봄은 더욱 간절하고 매력이 넘친다. 그렇다고 그런 봄을 탓할 일은 더욱 아니다. 기다리면 어느 틈엔가 봄은 와 있다. 새순이 트고, 꽃을 피운다. 반드시 봄꽃을 피운다. 성미 급한 사람들 때문에 잎도 없이 꽃을 피운다. 담장을 노랗게 덮기도 하고, 온 산을 빨갛게 수놓기도 한다. 그러나 가을꽃은 절대 피우지 않는다. 그래서 들국화는 피지 않는다.
얼음판 위를 살짝 덮은 눈길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때론 필사적으로 허공에 손을 휘젓기도 하지만 소용이 없다. 누가 미끄러뜨리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덜푸덕’ 소리가 들려온다. 때론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때론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것 또한 남모르는 재미이다.
그렇게 웃다보면 계곡을 만난다.
하얀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른다. 그 아래로 봄이 흐른다.
하늘이 아무리 시치미를 떼고 시샘하는 바람을 불어대고 있어도 봄은 온다
저 계곡 속으로, 저 나뭇가지 사이로 봄날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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