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쏙] 문화 불균형 해소하는 ‘작은영화관’
작은 영화관 ‘지평선시네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전북 김제에 있다. 지난해 8월에 문을 연 이곳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올망졸망 앉아서 영화 보기 좋은 곳이다. 좌석이 모두 99개인 지평선시네마는 지역간 문화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앞장선 작지만 큰 영화관이다.
“영화관의 큰 화면에서 공룡을 볼 수 있어 기뻤어요.”
지난 8일 오전 11시40분께 전북 김제시 도작로 청소년수련관 1층에 있는 작은영화관 ‘지평선시네마’에서 신광어린이집 어린이 65명이 몰려나왔다. 어린이들은 방금 보고 나온 영화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느라 왁자지껄 들떠 있었다. 아이들은 이날 작은 아기 공룡이 어려움을 딛고 늠름한 어른 공룡이 되기까지 과정을 다룬 80분짜리 애니메이션 <다이노소어 어드벤처>를 단체 관람했다. 유정원(5)군은 “좋아하는 공룡을 친구들과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김순자(46) 신광어린이집 원장은 “여름과 겨울로 나눠 1년에 두 차례 정도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관이 없을 때는 인근 전주로 아침 일찍 출발해 영화를 본 뒤 되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은 시간이 단축돼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고 말했다.
김제평야는 지평선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논이 드넓은 덕분에 예부터 농경사회의 중심지였다. 김제는 1950·60년대에 인구가 26만명이었다. 당시에는 면 단위에도 영화관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구가 9만1218명으로 줄어들어 문화시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영화관이 없던 김제시에 지난해 8월 지평선시네마가 생겼다. 청소년수련관 일부를 다시 꾸며 문을 여는 데 지방비 10억원이 들어갔다. 김제시는 작은영화관을 개관하면서 주민들이 싼값에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위탁을 주지 않고 직영하고 있다. 관람료는 일반 영화 5000원, 입체(3D) 영화는 8000원을 받는다. 1관(65명)과 2관(34명)을 합쳐 99명이 동시에 영화를 볼 수 있다. 현장에서 표를 사거나 온라인 누리집에서 예매를 할 수 있다.
요즘은 방학이고 농한기인데다 영화 <변호인>의 인기까지 겹치면서 지평선시네마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주민 백태수(41)씨는 지난 8일 오전 가족과 함께 왔으나 좋은 자리가 없어 관람하지 못하고 오후치를 겨우 예약할 수 있었다. 백씨는 “과거에는 영화를 보려면 익산이나 전주로 갔는데 가까운 곳에 영화관이 있으니까 수시로 올 수 있어 좋고, 가격도 싸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김제시 공무원 남혜선(33)씨는 “한번은 73살 할아버지한테 ‘인터넷으로 영화표를 예매하기가 어렵다’는 문의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하도 간절해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도 문화생활을 고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제시는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을 위해 영화 홍보 게시판을 아파트 단지와 마을 노인정 등에 설치할 예정이다.
영화관 없는 김제·장수·인제 등
100명 남짓 볼 상영관 문 열어
먼 도시 안나가도 인기작 관람
주민들 “싼값에 문화생활” 만족
문체부 2017년까지 국비지원해
극장없는 지자체 103곳에 설립
영화관 규모가 작다는 일부 지적도 있지만 관객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주민 최순희(51)씨는 다음날(9일) 영화표를 예매하기 위해 이날 영화관을 찾았다. 이 영화관을 세번째로 왔다는 최씨는 “이곳 청소년수련관 수영장에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영화를 본다. 흥행이 안 되는 영화가 들어올 때도 있음을 고려하면 이 정도 규모가 적당하다”고 말했다.
사업을 시작할 때는 ‘시골 어르신들이 얼마나 영화를 보러 올까’란 우려도 있었지만 지평선시네마에는 예상보다 관객이 많이 들었다. 지난해 8월26일부터 12월31일까지 2만4690명이 다녀갔다. 4개월 동안 김제 전체 인구 4명 중 1명꼴로 영화을 본 셈이다. 지난해 수입은 1억6000여만원을 기록했다.
지평선시네마가 생기면서 김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서울과 같은 날 똑같은 영화를 개봉하면서 지역사회가 문화적 소외감을 극복하게 됐다”는 게 김제시 쪽 설명이다. 도농 간에는 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문화적 격차도 상당하다. 전국 영화관 314개 중 138개(44%)가 몰려 있는 수도권에서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근처 영화관에 가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농촌에서는 영화 한편이나 책을 한권 보려 해도 30분에서 1시간가량 차를 타고 인근 도시까지 가야 한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극장이 없는 곳이 103곳이다. 극장이 인구가 많은 곳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서울 시민은 한해 평균 4.7회 영화를 본 반면, 전남 주민은 1.5회였다. 도시와 농촌 사이에 벌어진 문화 격차를 작은영화관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지평선시네마는 시민 소통의 공간 구실도 한다. 지난달 9일에는 김제시 백산면 이장단 회의가 지평선시네마에서 열렸다. 이장들은 회의을 마치고 함께 영화를 봤다. 딱딱하고 지루했던 이장단 회의 분위기가 같이 영화를 보면서 한결 부드러워지고 의사소통이 활발해졌다고 한다.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도 문화이용권(바우처)으로 1415명이 관람해 소외계층의 문화복지를 확대하는 효과를 거뒀다.
김제시에서 직접 운영하다 보니 영화 배급 등에 어려움이 있다. 인기 영화를 움켜쥔 대형 배급사들이 작은영화관 배급에는 소극적이다. 김제시는 앞으로 다른 지자체에도 작은영화관이 많아지면 협동조합을 구성해 공동 구매하는 방식으로 단가를 낮추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김제에서 꽃을 피운 작은영화관 사업은 4년 전 전북 장수군이 시동을 걸었다. 장수군은 2010년 11월 자체 비용으로 농촌영화관 ‘한누리시네마’를 열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인태 전북도 문화예술과장은 “장수군의 작은영화관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이 좋아서 이를 전국화하도록 문화체육관광부에 요청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오전 전북 김제시 도작로 작은영화관 ‘지평선시네마’ 앞에서 단체관람 온 신광어린이집 어린이들이 포즈를 취한다. 김제/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
작은영화관은 김제 등 전북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인구 3만2000여명에 불과한 최전방 강원도 인제군에도 2010년 10월 개봉 영화관이 생겼다. 80년대 중반 이 지역의 개봉 영화관 3곳이 모두 사라진 지 20여년 만이다. 읍내에 있는 인제하늘내린센터에서는 둘째·넷째 주말과 공휴일에 최신 개봉 영화를 상영한다. 스리디 영화 상영이 가능한 시설도 갖췄다.
인제읍에 살고 있는 주민 박영호(54)씨는 동네에 개봉관이 생기면서 잃어버렸던 영화 감상 취미를 되찾았다. 박씨는 “어릴 적 부모님 손을 잡고 지금 인제문화원 자리에 있었던 극장을 찾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역의 영화관이 모두 문을 닫으면서 영화를 보려면 두시간 차를 타고 춘천이나 속초로 나가야 했다. 이제 조금만 걸어가면 개봉 영화를 동네에서 싸게 볼 수 있다”고 반겼다. 김민혁 인제군문화재단 영화관 담당은 “지난해 9000여명이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관이 생기면서 전방에서 근무하는 군 장병들이 휴가나 외박 때 인제에 머물면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경남은 올해 남해군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10곳에 100석 규모의 작은영화관을 설치할 계획이다. 충북 제천시는 10억원을 들여 제천시 모산동 의림지 주변에 작은영화관을 지을 참이다. 의림지 입구 이벤트홀로 쓰이던 건물의 구조를 변경해 200석 규모의 영화관을 지으려는 설계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경북 영덕군도 작은영화관을 만들 계획이다. 영덕군은 지난해 3월부터 예주문화예술회관에서 주말과 공휴일에 영화를 상영했다. 그런데 예상을 뛰어넘어 영화를 보려는 주민들이 몰리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129차례 영화가 상영됐는데 2만690명이 찾아왔다. 이를 계기로 영덕군은 예주문화예술회관 옆에 2층 규모로 250석 규모의 작은영화관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국비로 작은영화관 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극장이 없는 기초지자체 103곳 전체에 작은영화관을 설립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차로 올해 22곳(자체 조성 12곳 포함)에 작은영화관을 만들 계획이다.
작은영화관은 문화소외 지역 주민의 삶의 질에 큰 변화를 이끌어낼 작은 변화로 꼽힌다. 장수와 김제 등에서 시작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전국 103곳에 태풍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
김제/박임근 기자, 전국종합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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