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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후기/2004년

도장골과 촛대봉

by 에코 임노욱 2016. 5. 19.

도장골과 촛대봉
- 구름모자 -

 늦은 저녁 지리산 자락을 찾는다. 오랜만에 산만큼이나 풍성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지리산도 넓은 품 한 귀퉁이를 열어준다. 마치 자신의 몸을 눕혀 어린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돼지처럼 우리에게도 품에 안기어 주린 배를 채우라는 듯 그 한 꼭지를 내어준다.
 내대리 거림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9시가 지난 시간, 흐려진다는 예보와는 달리 별이 총총하고, 만월을 꿈꾸는 반달이 살을 찌우고 있다.
 서둘러 짐정리를 하고 길상암 앞을 잰 걸음으로 빠져 나간다.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지리산 끝자락에 기댄 조그만 수행장소에 지나지 않았던 암자가 이젠 속세의 왠만한 사찰규모보다 더 큰 건물로 들어서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먼저 앞선다.

이방인을 경계하는 개짓는 소리를 뒤로한 채 계곡 옆 철조망을 통과하니 곧 조그만 등산로가 시작된다. 지리산 여느 등산로와 같지 않고 오솔길인 게 처음부터 정이 간다. 언제부턴가 비밀을 간직한 도망자처럼 지리의 숨은 계곡만을 찾아다니면서 생긴 버릇이다.

경쾌해야할 발걸음이 왠지 무디어 가만히 생각하니 그때서야 오늘 하루종일 밥알 한톨 구경을 못했음이 생각난다. 허기진 배를 망가님의 둥글래차 한 모금으로 채우고 사그락 거리는 산죽밭을 나아간다.
물소리로만 확인하는 아랫용소를 지나 첫 번째 물을 건너는 곳에 이르면 오른쪽에 넓은 반석이 있고 예전엔 풀밭으로 제법 넓게 텐트를 놓을만한 터가 있었는데 오늘은 거친 자갈밭뿐이다. 작년 루사와 매미가 쓸고 간 후 훼손된 뒤끝이 아직 복원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여름 광란의 거대한 힘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욱이 나무 위 우리키를 넘는 걸 보면 자연의 힘만으로 그 전 모습을 갖추려면 아마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 하다. 다만 우리네 인간들이 애써 덮으려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건드리지 않고 있으면 오히려 그 상처가 더 쉽게 아물 성 싶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기에...

그 이상을 올라도 내가 아는 야영터가 없는지를 아는터라 불편하지만 그곳에서 하루를 눕히기로 한다.
서둘러 텐트를 설치하고 모닥불을 놓아 저녁을 준비한다. 하루종일 할 일이 없었던 위장이 모처럼만에 곡기가 들어오니 신이 났는지 거침없이 들어오라 주문한다.
유난히도 눈을 뿌리지 않는 올 겨울은 이 넓은 계곡에도 가뭄이랄 만큼 적은 수량이 졸졸 흐르고 그나마도 대부분 얼어있다. 하늘에 별이 흐르듯이 물길엔 물이 흘러야 제 맛인데 계곡가 야영이 적막하니 왠지 쓸쓸함이 밀려온다. 사그라지는 모닥불을 정리하고 산자락에 기대어 몸을 눕힌다.(02시00)

6시30분, 병도가 기상을 알리고 밥짓는다, 국끓인다, 시끌벅적하지만 내가 밖으로 나온 한참 후, 노욱이가 밥을 퍼달라고 왜치는 데도 코펠속의 쌀은 아직 덜 익어 있다. 그렇게 잔소리가 이어진 아침을 마치고 일어난 시간 8시35분. 출발을 서둘러 계곡으로 나서니 첫 번째 지류 흰돌골이 아래로 보인다.
계곡을 건너로 이어진 오름길을 오르다 계곡과 너무 벗어나지 않았나 의심해 보지만 이내 확인을 한다. 계곡 바로 위쪽으로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길은 고로쇠 채취꾼들의 작업로였다. 그나마 병도가 가지고 있던 지도는 계곡 우측으로 길을 표시해놓아 무지한 산꾼들의 손에라도 들리는 날이면 아무리 잘해도 고생 두 배, 잘못하면 대형사고나기 십상이지 쉽다.

계곡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지만 길은 곧 계곡을 우측으로 다시 건너고, 너덜지대를 지나 윗용소 위쪽에서 또 한번 왼쪽으로 건너게 된다.
해발은 이미 천을 넘었지만 아직은 눈도 없고 시간도 여유가 있어 마음이 한가로우니 허허롭기만한 계곡에 모처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눈을 기대하고 왔던 이중화가 발목을 두텁게 잡고 있어 발길은 불편하지만 세 해를 같이 갔던 방수화가 작년 가을 대둔산 릿지후 바닥창이 벌어져 대안이 없었던 터라 저 위쪽 어디쯤에서부터는 허리를 넘는 눈이 있을거라 자위하며 앞을 나선다.
이데올로기 시대에 파르티잔 지휘소와 후송병원이 있었다는 이 골짜기를 혹자들은 뱀사골, 한산골, 칠선골의 알짜배기만 모아놓은 곳이라 칭송하기도 하지만, 겨울 가뭄탓에 오늘은 그런 풍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다만 계곡 속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집채만한 바위들과 반석이 그 유명세를 대신하고 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서서히 눈이 밟히기 시작하고 산죽밭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 와룡폭포를 찾아나서지만 계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 계곡을 내려서 굳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저 길을 내려서면 일출능선으로 연하봉 오름길이 계곡 건너로 있지만 오늘은 촛대봉 능선을 오르는 길이어서 굳이 확인 할 일도, 쉬어갈 일도 없기 때문이다.
와룡폭포는 등산로 변에서 넓은 반석 위로 길게 흐르는 누운 와폭임을 확인 한 후 길을 재촉한다. 눈의 깊이가 점점 깊어지고 계곡이 둘로 갈리는 지점에서 좌측 촛대봉골 길을 택한다. 우측 도장골 본류로 오르는 길은 사태지역에서 일출능선을 직접 차올라 연하봉에 이르는 길로, 계곡 건너엔 표시기가 하나 매달려 있다.

여느때 같으면 아직도 넓은 반석으로 이어진 아기자기한 계곡이 이어지지만 오늘은 계곡을 가득매운 얼음뿐이어서 그 흔한 계곡물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다.
해발 1,220지점에서 전대원을 다시 무장시키고, 얼음구멍을 내어 식수를 준비한다.
계곡과 근접하여 이어진 길은 가끔씩 눈속에 빙판이라는 복병이 숨어있어 긴장을 늦추어서는 않된다. 간간이 표시기가 보이긴 하지만 거의 퇴색한 것들이고, 누구의 장난인지 바위며, 거목기둥에 뿌려진 빨간페인트의 입산금지 경고문이 더 확실한 길잡이를 해준다.
와룡폭포 위쪽에서 계곡이 둘로 나뉘면서 넓이는 한결 좁아졌지만 아직 여느 산과는 비교도 않될만큼 규모가 있어 지루하지 않게 오를 수 있다. 그리고 곧 촛대봉을 오르는 지능의 옆 줄기를 급경사로 오르게 된다. 간간이 눈들이 녹은 양지에는 잔돌들이 구르기도 하지만 힘만 조금 들이면 큰 위험 없이 해발 1,400지점인 지능 끝자락에 오를 수 있다.

천왕봉 정수리가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서 배낭을 내리고 거친 숨을 들이며 간식을 먹는다. 바로 앞에는 시루봉이 제법 위엄있게 앉자 있고, 저 멀리 하늘금에는 촛대봉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아 있다.
아직 시간이 11시니 오늘 일정은 여유있겠다 싶어 한결 마음이 놓인다.
시루봉은 첫머리부터 급한 절벽으로 우리를 압도하지만 그리 문제될 만큼 어려운 길은 아니다. 또한 자세히 보면 좌측으로 우회하는 길도 보여 그쪽이 쉽지 않을까 생각도 들지만, 그냥 무대포처럼 정수리를 이등분한 후 가르마를 타듯 정중앙으로 나아간다 생각하고 오르면 시루봉 정상까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물론 중간중간 층을 이루며 단애가 가로놓여 있기도한데 바위 사이를 자세히 보면 사람지나다닌 흔적이 뚜렷하여 조금만 세심히 관찰하면 길 잃을 염려는 없다. 마지막 봉우리에서 고민을 하다 좌측으로 우회를 해 보았지만 역시나 직등하는 길이 훨씬 더 짧고 오르기가 수월했다.
이곳 정수리에 오르면 선계가 펼쳐진 듯한 조망이 가히 환상이다. 가깝게 보이는 촛대봉을 축으로 영신대, 칠선봉, 토끼봉 반야봉 노고단이 일망무제로 보이고, 그 곳에 겹겹이 가지를 지른 남부능선과 불무장등, 왕시루봉 능선이 섬진강 앞으로 사열하듯 늘어서 하늘금을 이루고, 우측으로는 연하봉과 톱날같은 이를 가진 일출능선 뒤로 천왕봉이 제왕처럼 떡 버티고 않자 있다.

내가 올라 섯을 때 처음 느낀 이 경관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봐 왔던 지리의 모습이 아니라, 슬라이드처럼 순백의 화면에 순간적인 동작으로 새로운 필름을 옮겨 놓은 모습이어서 더 진한 감동이 몰려올 뿐 아니라, 오늘같이 화창한 날, 예의 혼잡스런 시장터 같은 주능선 분위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능선을 오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새로운 풍광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다른 때, 다른 장소에서 보는 조망과는 그 감동의 느낌을 비교할 수 없음이다.
예까지 올라 왔으면 오름길은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촛대봉 오름길까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오솔길 같은 느낌을 주는데다가, 해발이 높아 키 큰 관목들이 사라져 촛대봉 조망을 즐기며 쉬엄쉬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키로 서있는 주목과 철쭉밭 사이에 있는 촛대봉 샘터를 지나 좌측으로 휘어진 산길을 걸으면 서편 아래 세석산장이 알프스 어느 초원분지에 세워진 별장처럼 아담하게 보이고, 장터목에서 오는 주등산로를 만나면 세석은 한 걸음에 도착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는 장소는 왠지 산이 아닌 부산한 대합실 같아 음양수로 내려가 점심을 먹기로 한다.

음양수는 멀지 않았으나 거림으로 가야하는 우리를 잠시 생각하게 만든다. 점심을 먹고도 다시 20분정도를 되돌아와야 거림으로 가는 정규 등산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산속에서 먹는 즐거움이 어딘데 그깟 고생에 흔들릴 수 있으랴? 한 걸음에 음양수에 도착하여 점심을 푼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성찬이다. 10명이 둘러앉자 그렇게 먹어도 고기는 세근이나 남았고, 라면은 하이에나 몫까지 7개로 충분했다.
이제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노욱인 그 급한 성미를 참지 못하고 춥다며 먼저 일어서고, 난 희망자를 모아 지계곡을 차고 내려가기로 했지만 노욱이 뒤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간도 있으니 새로운 경험도 할 겸 지도를 머릿속에 입력하고 우측 지계곡으로 꺾는다. 산죽밭으로 여린 길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길과 함께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제법 규모를 갖춘 계곡을 건너자 비로소 낮익은 표지기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보고 싶은 준 그리운 희’ 어느 애뜻한 연인들의 사랑하는 감정이 절로 묻어나는 이 표시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익히 보아왔던 문구이다.

눈속에 산죽밭과 너덜강, 또는 키 큰 나무사이를 알탕알탕 연결해 이어진 이 길은 맨 좌측 능선 뒤로 정규등산로가 있음을 머릿속에 그리며, 사람 흔적을 주위 깊게 살펴 내려서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다만 짧은 구간이어서 도상으로는 그만한 능선과 계곡이 형성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나, 세 번이나 계곡을 횡단하고 제일 좌측 지능 끝머리까지 내려가서야 세석에서 내려오는 정규 등산로를 만날 수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이런 모두가 지리산의 규모와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들이다.
거림길 정규등산로와 만나는 곳은 북해도 나무다리가 서있는 코앞이다.(3시20분)
마지막 간식을 먹은 후 이제는 걱정꺼리도 없이 넓게 트인 등산로를 따라 콧노래를 부르며 모두가 거림마을에 내려서니 5시가 채 않된 시간이었다. 모처럼만에 해방감에서 맞는 여유로운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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